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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녀가 떠나간 자리에는

할머니 제삿날 밤
어머님이 그리운 음성으로 말씀하신다네 할머니가 떠난 자리는 늘 정갈했느니라
할머니가 부엌에서 나오고 나면
솥뚜껑에도 살강에도 먼지 한 점 없었고
해질녘 논밭을 나올 때면
이삭단도 거름더미도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느니라

할머니가 난생처음 버스를 타고 벌교장에 가던 날
정류장 바닥에 흰 고무신을 단정히 벗어두고
버선발로 승차하는 바람에 한바탕 웃음꽃이 터졌고
달 밝은 밤 슬그머니 도둑이 들었을 때도
가난한 집안 살림이 잘 정돈돼 있고
마당에 빗자루 자국이 하도 선명해
그만 발길을 돌려 나가다 빗자루로
제 발자국을 쓸고 돌아갔다는 이야기

할머니는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부터
장롱 서랍을 정리하고 장독대와 부엌을 정리하고
울타리가 화단에 줄지어 꽃씨를 심어놓고
갓 시집온 어머니를 불러 며늘 아가 미안하다
이웃집에 달걀 두 꾸러미, 아랫집에 보리 석 되,
건넛마을 김씨네에 깨 한 되 찹쌀 한 말,
이장네 소 부린 품삯을 조목조목 일러주고
한 사흘 앓다가 가는 잠에 살풋 가신 우리 할머니

그녀가 떠난 자리는 늘 단정했기에
그녀는 인생을 뒤돌아보지 않고
단단한 걸음으로 날마다 전진했으니
그녀가 떠난 다음 해 봄날 아침
단아하게 피어난 금낭화 붓꽃 작약꽃을 보고
꽃밭에 홀로 앉아 울었노라고

어머님은 그리운 음성으로 말씀하신다
그녀가 떠나간 자리는 늘 단정했는데
내가 떠나간 자리는 여전히 부끄러워

– ‘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’ 박노해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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